박찬욱이 복수를 사랑하는 법 ll

<올드보이>

복수 3부작 중 <올드보이>로 보는 전위적 스타일.
전편(박찬욱이 복수를 사랑하는 법 I) 확인하기


전작 <복수는 나의 것>과 달리 <올드보이>는.

<올드보이>는 전작 <복수는 나의 것>과 달리 고전적인 복수의 플롯을 잘 따라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인물의 성격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또한,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주인공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우연한 상황들에서 비롯된 복수극을 거리를 두고 지켜본 반면, <올드보이>는 오대수와 이우진의 대결이 작품의 중심축을 이루어 더욱 가까이에서 강렬한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안에서 대립 구도는 15년간 감금을 당한 프로타고니스트 오대수와 15년간 오대수를 감금한 안타고니스트 이우진이 주축을 이룬다. 오대수는 아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납치를 당해 15년간 좁은 방 안에서 감금된 채로 군만두로만 매 끼니를 채워야만 했다. 게다가 오대수의 아내는 오대수가 감금된 후 1년 뒤, 아내는 오대수 자신이 죽인 것처럼 조작되어 피살되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15년의 시간은 영화 시작 18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으로 압축된다. 이를 통해, <올드보이>는 복수의 플롯 2단계인, 복수를 계획하고 추적하는 단계에서 영화의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전개됨을 알 수 있다.


누가, 그리고 왜

오대수가 15년간 갇힌 감금방은 법적 처벌이 불가능한 사람들에 대한 복수가 이미 실현되고 있는 곳으로, 법이 미칠 수 없는 곳이라는 점에서 극악무도하며 공포스럽다. 이러한 감금 방이라는 존재는 “누가, 그리고 왜 오대수를 극악무도한 곳에 가두었는가. 그토록 미워했다면 왜 죽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째서 풀어주었는가.” 와 같은 여러 가지 의문점을 유발한다. 앞서 언급했듯, <올드보이>는 짧은 1단계 이후 2단계에 꽤나 많은 시간을 가지는데, 2시간의 러닝타임에서 무려 1시간 10분을 오대수가 이우진을 추적하는 과정에 사용한다. 이를 통해 <올드보이>는 추적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일종의 ‘추리극’임을 알 수 있다. 오대수와 관객은 과연 ‘누가’, 도대체 ‘왜’ 오대수를 감금방에 가두었는지를 추적해서 밝혀내야만 한다.

추적의 단계에서 이우진은 오대수가 자신을 찾기 위한 단서를 준다. 여느 복수물들이 복수를 행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3단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올드보이>에 안타고니스트까지 나서며, ‘누가’, 그리고 ‘왜’에 대한 추적의 과정에 힘을 쏟는 구성은 매우 독특하다. 그렇다면 올드보이가 추적의 과정에 힘을 쏟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앞서 언급했던 ‘왜’에 대한 해답을 풀었을 때, 3단계를 다다르게 되면서 새롭게 맞이하게 되는 국면에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관계의 역전

결국 ‘왜’에 대한 해답을 풀고 자신을 찾아온 오대수에게 이우진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바로 자신의 누나 오수아의 죽음의 책임이 누나와 자신의 근친상간에 대한 소문의 원인이 오대수에게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 책임을 물어 오대수를 15년간 감금하고 자신을 복수하도록 찾아오게끔 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역전’이 일어난다. 오대수는 지금까지 자신을 지독한 불행에 빠트린 이우진을 추적해왔다. 그리고 대결의 국면에서 이우진을 응징하려고 한순간, 이우진이 새롭게 알려준 진실에 의해 지금까지의 삶이 모두 안타고니스트인 이우진에 의해 계획되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오대수는 이우진에게 복수를 통해 응징하는 것이 아닌, 이우진의 복수를 위해 움직여졌다는 것이다. 사실 서사의 중심은 이우진이었고, 복수를 행하는 자 역시 이우진이었던 것이다. 이우진이 의도한 대로 플롯이 전개되며, 오대수의 복수는 당연하게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프로타고니스트인 이우진의 복수가 승리로 돌아간다.

“복수가 다 이루어지고 나면 어떨까? 아마… 잊고 있던 고통이 다시 찾아올 걸”

그럴듯한 복수는 없다

그렇다면 안타고니스트로 전락한 오대수는 과연 가정을 잃고 15년의 세월과 가정을 잃어버리고 최면에 걸려 자신의 딸 미도의 근친상간을 해야할 만큼 큰 잘못을 했는가. 복수의 플롯이 처절한 응징을 통해 정의를 바로 세우며 관객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면, 이우진은 과연 정의를 바로 세웠는가. 오대수는 이우진의 누나를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살해하였는가. 관객의 입장에서 오대수는 죄를 저질렀으나, ‘이우진과 이우진 누나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는 그 죄목은 그가 치뤄야만 했던 대가에 비해 너무나도 경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뿐만 인가. 관객은 오대수가 ‘자신은 개보다 못하다’며 이우진의 발을 핥고, 죄를 저지른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르며 반성을 하는 엽기적인 행위에서 대다수의 관객은 오대수가 저지른 사소한 실수 정도는 일상에서 늘 쉽게 범할 수 있기에 공포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이우진은 자살하려는 누나의 손을 직접적으로 놓았기에 직접적인 죽음의 책임은 오히려 이우진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관객은 이우진이 내세운 정의에 어떠한 감정의 정화도 느끼기 어렵다.

또한 이 영화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하는 지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우진의 자살이다. 오대수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긴 채 엘리베이터 안에 오른 이우진은, 누나 오수아의 죽음을 회상한다. 그는 손을 뻗으며 누나의 손을 놓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 후, 이우진은 본인이 의도한 대로 완벽한 복수를 이루었음에도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누며 자살한다. 복수에 성공한 이우진의 허망한 죽음은, 관객들이 감정의 정화를 느끼기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이다.


복수라는 아이러니

이우진이 오대수가 언젠가 최면술사를 찾아올 거라는 말에, 최면술사는 “그럼 그때, 새로운 암시를 부여할까요? 자살을 하라거나... 아니면, 미도를 죽이라거나 하는...”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우진은 “그냥 이렇게 전해주세요. 행운을 빈다고.”라고 말한다.

이 대목은 상당한 아이러니를 유발한다. 이우진은 분명 오대수를 복수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할 만큼, 죽도록 미워함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이우진은 왜 오대수를 향한 동정을 암시하는 말을 하였을까. 이는 영화에서 시사하는 ‘복수’의 의미에 있다.

“짐승같은 놈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

그는 오대수에게 복수를 성공하였음에도, 누나의 죽음을 회상하며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자살한다. 결국 복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허망하고 덧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우진이 앞서 말한 대목에서, 영원한 고통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오대수에게 통찰과 더불어 같은 처지를 느꼈던 것이다. 아마도 이우진이 자살한 까닭은 복수의 허망함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드보이>라는 참극(慘劇)

사소한 성격적 결함에 의해 퍼뜨린 소문에 대한 이우진의 응징으로 15년간의 감금과 아내의 죽음, 딸 미도와의 근친상간, 속죄하며 혀를 자른 엽기적인 행위까지. 오대수의 남은 삶은 이우진의 죽음보다 못한 형국이 될지도 모른다. 하물며 이우진은 어떠한가. 이우진은 오대수의 소문에 의해 누나를 잃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피해자이며, 복수를 성공했음에도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러한 두 인물에게 우리는 동정의 감정도, 미움의 감정도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올드보이> 역시 <복수는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정화와 카타르시스는 경험하지 못할 듯하다.

전형적인 복수 3단계를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으나 어떠한 감정의 정화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 3단계에서의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관계 반전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 반전에서 누구도 호쾌한 ‘정의’를 내세우지 못했다는 것. <올드보이>를 통해 박찬욱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복수극은 카타르시스와는 거리가 먼, 복수로 인한 두 인물의 허망한 참극(慘劇)이다.




Editor / 김성욱(@wookke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