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기억을 담고, 메모리얼은 세대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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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시간을 넘어 존재한다. 특히 사건, 사고에 휘말려 희생당한 이들과의 기억은 남은 사람들에게 잊고 싶지 않은 추억으로 남는다. 떠난 이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하며,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들을 떠올리고 새기며 살아간다.

메모리얼은 죽은 이들을 기리는 추모의 건축물이다. 그러나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기억을 물리적으로 형상화한 공간이다. 메모리얼은 우리의 시선과 동선에 따라 주변 환경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시대를 기록하고 희생자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공간에 영원의 흔적을 담아내는 것, 그것이 메모리얼이 가진 힘이다.



< 투박함 속 담긴 깊은 서사 >

"나는 사람들이 잊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이름을 새겼다. 이름은 단순한 기호 이상의 무게를 지니며, 그것이 사람들의 기억을 영원히 붙들어 주기를 바랬다." / - 마야 린(Mata Lin) -

산책을 하듯 자연스럽게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의 옆으로, 의식하지 못하게 비추는 검은 벽들이 점차 시야를 채운다. 어느 순간, 거대한 벽이 눈앞을 가득 메우고, 그 벽에는 수천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경사로를 따라 내려갈수록 전쟁의 참상이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고 그 감정이 최고조에 이를 때, 코너를 돌면 링컨과 워싱턴 메모리얼이 모습을 드러낸다. 공간 속에서 억눌렸던 감정의 해소와 함께 일상으로 복귀한다.

Vietnam War Memorial - 360 Degree Video / Joseph Raczynski

건축가 마야 린(Maya Lin)은 1982년, 단 21세의 나이에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 디자인 공모전에서 우승하며 메모리얼 건축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녀의 디자인은 전통적인 영웅적 기념물 대신, 검은 화강암 벽면에 전쟁에서 희생된 58,000여 명의 이름을 새기며 ‘치유와 대화’를 강조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승리의 서사가 아닌, 국가적 트라우마로 남은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기리면서도 반성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것은 건축가들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나 마야 린은 이 난제를 해결하며 기억의 상처를 마주하고 치유와 재해석의 공간을 제안했다.

V자 모양과 완만한 경사로로 이루어진 단순한 디자인은 공간 속에서 감정의 흐름을 이끈다. 벽면의 이름들이 반사하는 주변 환경은 희생자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관람객의 감정을 절정으로 이끈다. 코너를 돌아서 만나는 링컨과 워싱턴 메모리얼은 슬픔 속에서 미국의 승리와 희망을 상징하며, 방문객들에게 해소의 여운을 남긴다.

베트남 메모리얼은 기억의 공간을 넘어, 국가가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고 이를 통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메모리얼의 역할을 제시했다. 단순히 과거를 기리는 데 그치지 않고, 반성과 미래로의 연결을 이끄는 과정의 일부로 자리 잡은 것이다.


<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의 크기 >

"의도가 있는 침묵, 목적을 가진 공백을 만들고 싶었다." / -마이클 아라드(Michael Arad) -

앞서 다룬 베트남 메모리얼은 기억의 공간을 넘어, 국가가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고 이를 통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메모리얼의 역할을 제시했다. 단순히 과거를 기리는 데 그치지 않고, 반성과 미래로의 연결을 이끄는 과정의 일부로 자리 잡은 것이다.

베트남 메모리얼을 설계한 마야린은 이후 미국의 가장 아픈 상처를 치유할 다른 적임자를 찾는 9.11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된다.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알카에다의 테러는 두 대의 비행기로 세계 무역의 심장인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두 건물에 차례대로 돌진했고 이후 일어난 일은 믿기 힘든 참사의 상황들이었다.

미국 역사 상 최악의 테러로 여겨지는 9.11 테러는 당시 많은 국민들에게 큰 상처가 되었고 그 사건을 기리는 메모리얼 건축 공모에 마야린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는 뉴욕에서의 비자가 만료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하던 무명의 건축가 ‘마이클 아라드’를 건축의 적임자로 선정했고 그가 디자인한 메모리얼은 미국의 가장 상징적인 메모리얼 파크로 자리잡았다.

911 memorial park / Zeke L

건축가 ‘마이클 아라드’가 디자인한 메모리얼 파크는 분주한 뉴욕 한복판, 커다란 광장 가운데 있는 두 개의 거대한 빈 연못으로 도시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을 멈추게 한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은 연못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지만, 그 공간은 아무리 흘러도 채워지지 않는다. 연못 가장자리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금속 패널에 새겨져 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이름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상징하며, 하늘로 이어지는 공백은 그들의 빈자리를 영원히 기억하게 한다.

서론으로 돌아가 기억은 시간을 넘어 존재하고 공간은 기억을 담는다. 그리고 마야린의 베트남 메모리얼에서 ‘마이클 아라드’의 9.11 메모리얼까지 이어지는 메모리얼 건축의 흐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다가올 세대들에게 기억을 연결을 실현시킨다. 따라서 메모리얼 건축은 우리에겐 필연적인 형상일 것이다.







Editor / 박수민(@suumn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