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방가르드의 거장, 테라야마 슈지의 영화적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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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나의 표상, 아스라이 흐려지는 기억 속 테라야마 슈지

한 번쯤 잊기 힘든 악몽을 꾼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현실에 있었던 일이, 어떤 이는 트라우마가 곧장 꿈으로 나타난다.

테라야마 슈지, 그의 영화는 마치 악몽같다. 복잡하게 꼬인 내러티브, 기꺼이 연관성을 찾으려 발버둥 친다면 수많은 메타포를 마주하고 찝찝한 기분을 안은 채 막을 내린다. 잊히지 않는 트라우마를, 그리고 숱한 관념을 영화로. 관념은 곧 영화를 통해 옹골져 가고, 기억 저편의 트라우마는 옅어진다. 적어도 테라야마 슈지의 영화만큼은.



< ‘테라야마 슈지’라는 언어 >
테라야마 슈지가 활동하던 때, 1950-60년대 ‘새로운 물결’을’ 의미하는 ‘누벨바그’ 운동이 프랑스에서 활기를 차던 시기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등 현대 감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누벨바그 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고, 이때 일본에서도 ‘쇼치쿠 누벨바그’가 시작된다.

독특함과 상상력 없이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 혹은 고전주의 영화를 만드는, 당시 영화적 경향에 반하는 영화 운동으로 작가 주의를 함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쇼치쿠 누벨바그’는 작가주의 보단 일본 영화의 혁명을 목표로 바라봤다. 1958년 일본 영화의 황금기가 저물고 대형 상업 영화사와 같은 스튜디오 중심의 일본영화가 쇠퇴하면서 일본 영화계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그 패러다임에 일본 독립영화사 ‘ATG’가 뒷받침되었는데, 예술 영화와 소규모 제작을 해야만 했던 젊은 영화감독에 전폭 지원하며, 이들이 갖고 있는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잊는 데에 일조 했다. 그 중에서도 테라야마 슈지는 ATG와 함께 3편의 극영화를 제작하며 예술 영화 제작에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다.

ⓒcinenouveau

그가 처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1935년도에 태어나 10대엔 일본의 시 양식 중 하나인 하이쿠로 이름을 알리고, 소설과 평론, 배우와 사진가 등 예술의 총 집합체, 창작이라면 뭐든 잘하는 천재 예술가라는 칭호를 달며 지냈다. 테라야마 슈지의 영화 입문은 1960년대 초 일본 누벨바그의 거장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 밑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시작해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 이후 ‘덴조사지키’라는 극단을 설립하여, 일본 연극계에 ‘아방가르드 장르’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여러 실험영화까지 제작하는 데에 힘을 쓴다.

우린 그를 무엇을 했던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까. 정의 내릴 수도, 직업 따위로 구분 지을 수 없는 그는 그저 테라야마 슈지다. 모호하기 보다 명확하기에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하이쿠와 소설 대신 영화를 선택한 이유도 자신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 테라야마 슈지의 영화 <전원에 죽다>에 미래와 과거를 오가며 “나는 누구인가”를 남기고,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에서 인간을 불완전한 시체에서 완전한 시체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그리고 죽음이 갖는 완전한 자유를 보여주었던 영화 <죄수>처럼.

ⓒTATE

< 그는 언제나 주객전도를 원했다, 수많은 메타포로 뒤섞인 영화 ‘죄수’ >
단테의 지옥문을 열고 있는 나체의 남성, 틈 사이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 스스로가 시계바늘이 되어 돌고 있는 사람, 들고 온 시계를 버리고 2분 30초가량 알 수 없는 춤을 반복하는 여자, 부서진 시계. 10분 분량의 단편 영화 <죄수>, 테라야마 슈지의 데뷔작이다. 첫 단추부터 강렬하다. 낯선 초록빛 장면과 꿈을 꾼 듯 아릿한 분위기, 시각적 이미지는 물론 가사와 특정 소리 없이 반복되는 멜로디만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알 수 없는 메타포로 가득 찬 테라야마 슈지의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동시에 집단적이다. 정돈되지 않은 그의 상상으로 뼈대를 세우고, 관객에게 영화의 구조적 물음을 던진다. 뼈대에 살을 붙여 나가는 건 우리의 몫이 되고, 이내 관객이 곧 테라야마 슈지가 된다. 특정 개인의 정체성을 가진 다수 중 한 명이 된 이후에야 우린 그의 영화를 읽을 수 있다. 타인의 상상 속에서 보는 이가 모종의 이야기와 주제를 붙여 나간다는 점에서 테라야마 슈지의 영화는 ‘관객의 주체성’을 영화 패러다임에 구축시켰다. 뻔한 클리셰와 주입식 엔딩의 할리우드 영화에 반항하며 탈구축적인 모호함으로 상상의 이미지에 호소했다.

Terayama Shûji - Ori (1964) The Cage

< 어차피 우린 죽을 운명 >
대중이 직면하지 못했던 사회적, 환경적 압력을 깨우치기 위함이었을까. 전통적인 영화의 권위로 낭만주의를 치켜세우기 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이 무엇에 맞닿아 있는지 자문하게끔 한다. 테라야마 슈지의 영화 <죄수>는 우리에게 ‘시간’을 묻는다. 도입부부터 굳게 닫힌 지옥문을 열고 있는 나체의 남성과 제각기 다른 시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 각자의 시계는 인간이 갖는 시간적 유한성을, 지옥문을 열고 있는 사내는 ‘자살’의 메타포로 쓰이고 있다. 지옥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고, 시계를 갖고 있던 이들이 부순 시계는 다시, 그리고 또다시 원상복구된 채로, 멀쩡히 돌아온다.

영화 <죄수>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제각기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동시에 시간은 우리가 직접, 인위적으로 거스를 순 없다. 시계를 들고 와 살포시 두고 춤을 추는 노인에겐 웃음꽃이 피었지만, 시계를 부수고 유한함을 거스르고자 하는 이들에겐 또다시 멀쩡한 시계가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테라야마 슈지 책의 꼭지 중 ‘자살학 입문’에서 동기 없는 자살과 스스로의 부족한 점으로 인해 목숨을 끊는 행위를 자살로 분류하지 않은 것처럼, 죽음은 오직 개인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의 종착역일 뿐이다. 만일 자살에 분명한 동기가 있다면, 그 자살은 이미 예견된 사실이었던 것. 테라야마 슈지는 희로애락이 가득한 우연 속에서 죽을 운명을 각인시킨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죽음은 곧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유임을 명시한다.


< 그때부터 였어요, 문학을 사랑한 게 >
영화 <죄수>로 경직되어 있던, 척박한 일본 영화계에 ‘반항’이라는 키워드로 새로운 호흡을 불어 넣어준 테라야마 슈지.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영화 <전원에 죽다>에서 모든 것을 설명한다.

1934년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테라야마 슈지, 아버지의 잦은 출장으로 어머니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모처럼 어머니와 저녁을 보내고 있던 중 1945년 아오모리 공습으로 그의 집이 폭파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는 입대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전쟁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전사해 돌아오지 못했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아들을 키우기 위해 일을 하러 가야만 했고, 테라야마 슈지는 친척 집에 맡겨져 지냈다. 평범했던 가정이 순식간에 전복되는 순간이자, 테라야마 슈지의 일생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런 그의 옆자리를 채워 줬던 건 문학이었다. 어려서부터 외로움에 벗어나기 위해 문학을 사랑했고, 문학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가 하이쿠 천재가 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문학 사랑은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전원에 죽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하이쿠부터 영화가 진행되는 도중에 읊는 시까지. 테라야마 슈지의 영화 속 시와 하이쿠는 하나의 상징으로, 몽환적인 연출과 영화의 내러티브에 더해져 ‘내포’와 ‘확장’의 개념을 갖는다. 주체성을 갖는 관객에게 수많은 가지로 뻗어나가는,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시와 하이쿠 이외에도 자신의 대표 단가집 <전원에 죽다> 속 단가가 영화에서 흘러 나오는데, 영화 <전원에 죽다>는 자신의 단가집 타이틀 그대로 각본, 감독, 제작을 모두 도맡아 완성한 오직 ‘테라야마 슈지’ 영화인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제작한 자전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의 일생을 들여다볼 수 있다.

ⓒyahoo

< 꿈을 꾸는 사람에게 그 꿈은 현실, 자전 영화 ‘전원에 죽다’ >
무덤가에서 또래 아이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는 한 소녀. “다 숨었니?”라는 말과 함께 정적이 흐르고 비석 뒤에 숨어있던 아이들은 온데간데없이 어른의 모습으로,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등장한다. 이후 찢어진 사진과 자신의 어머니를  묻으러 오소레잔으로 향하는 소년의 장례행렬, 저승사자처럼 검은 옷감을 두른 할머니들이 나오며 영화가 시작된다. 주인공인 소년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어리게만 보고, 집착하는 모습에 질릴 때면 오소레잔으로 올라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해달라며 소리친다. 그 바램은 항상 모종의 꿈을 유발한다. 에로틱한 메타포가 숨겨진 서커스장과 그곳의 단원들이 등장하거나 자신이 흠모하던 옆집 누나와 함께 기찻길을 따라 도망가는 꿈을 꾼다. 하지만 역시나 꿈은 꿈일 뿐, 현실에선 어리고, 하찮은 소년에 불과하다. 소년의 일대기가 진행되던 도중, 영화 상영이 끝난 듯한 분위기의 장면으로 넘어가며 <전원에 죽다> 2막이 시작된다.

2막에선 <전원에 죽다> 영화 속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감독과 선배 감독이 함께 그들이 생각하는 영화적 구조와 소재에 대해 읊조린다. 어린 시절을 영화의 소재로서 사용하는 것은 마치 그 시절을 우려먹는 느낌이 들고, 자신의 배경을 객관화 시키다 보면 하찮은 볼거리가 되어버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 속 선배 감독은 그것이 곧 어린 시절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라고 답한다. 테라야마 슈지는 자신이 갖고 있던 과거를 무뎌지게 하기 위해 자전적 영화를 만들었다.


<반복되고 강조되는 행동은 나를 평안하게>
“스크린을 수단으로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 그 과거 속에서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해체시키고 재구성한다.” 테라야마 슈지는 과거 아버지를 잃고, 어머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한편으로 그녀에게 얽매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터. 분명 짧은 생애 동안 어머니와의 사이가 매우 좋았지만 때론 애정 어린 어머니의 사랑이 자신의 남성성을 함몰시켰다고 생각했는지, 영화 속 주인공 소년은 ‘포경수술’과 ‘털’을 운운하며 스스로를 어리기만 한 소년이 아닌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성장을 원한다.

영화 속 어머니는 주체적 존재로 거듭나려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걸림돌에 불과하다. 그래서 감독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증조할머니를 죽인다면 지금 현재 ‘나’는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는 사라져버리는 것인지 생각한다.

과거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어머니를 죽이라고 명령하지만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자, 결국 자신이 직접 어머니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무기를 든 채 현관에 들어서고 상냥한 어머니를 마주하고 난 뒤, 그가 들고 있던 모든 것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죽이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자연스레 앉아 밥을 먹으며 과거 시대와 현 시대의 배경이 겹치며 영화가 막을 내린다. 테라야마 슈지는 과거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애착과 그에 반하는 회피, 대립되는 복잡한 감정 속에서 반항을 통해 본인의 주체성을 확립 시키고자 했다. 스스로의 트라우마를 그리고 무의식을 의식의 단계로 드러내며 영화 속에서 어릴 적 직면하지 못했던 문제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화해와 치유의 과정을 거친다.


<직면할 결심, 새로운 우리의 초상>
자전적일수록 테라야마 슈지의 색이 짙어진다. 그런 만큼 영화 <전원에 죽다>는 테라야마 슈지의 영화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데, 매번 바뀌는 작중인물 포커싱과 각자의 사정이 있는 듯한 에피소드, 영화 속 영화 등의 구성으로 뒤엉킨 서사 구조를 표현한다. 그의 영화에서 타임 패러독스와 비선형적 시간적 개념을 빼먹을 수 없을 터. 영화 <전원에 죽다>에서 테라야마 슈지는 정돈되지 않은 자신의 기억과 혼란스러운 과거를 타임 패러독스를 통해 해결해 나간다.

하지만 시간을 단순히 영화 <죄수>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유한한 시간의 굴레에 갇힌 인간이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가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전원에 죽다>에서 직접 무의식을 인식해 드러내고, 자가치유의 개념을 갖는 것처럼, 테라야마 슈지는 시간과 기억을 동일시하며 지나간 시간만큼 기억이 옅어져감을 알려준다.

ⓒTATE

영화 속에서 인간의 과거 속에 어느 하나 완벽한 기억 따위 없고, 그 기억을 묘사하려 할수록 선명해 지긴 커녕 옅어지고, 모호해진다고 말한다. 주관적 기억을 객관적 사실로서 재구성하고자 할 때에 기억은 마치 사실이 되어버려 원래 있던 기억이 허구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테라야마 슈지는 오히려 기억을 자세히 묘사하여 과거를 해체하고 기어코 재구성해 내며 기존에 존재하던 머릿속의 이미지를 새롭게 복원 시킨다. 영화에선 타임 패러독스를 통해 비선형적 구조를 그렸지만, 선형적 시간 구조로 이루어진 우린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 속에서도 과거를 들추고 직면하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테라야마 슈지는 초현실, 황당무계한 소재, 권력에 대한 반항과 비주류, 해방 등의 키워드로 영화를 마치 콜라주 하듯 자유롭지만 입체적인 구성을 보여 준다. 영상적 특징뿐 아니라 당시 심미주의가 만연했던 주류 영화의 고전적 영화미학의 전복, 아름다움에 반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문화적 물결 아래, 비일상적 관념을 심어준 테라야마 슈지, 표상으로 드러난 것을 양태로 다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Editor / 이정민(@jeongmlnl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