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소고 (小考) : EP.3 신카이 마코토와 이별과 죽음, 끝에 대하여

실존주의

실존주의 소고(小考)

'실존주의 소고'란 20세기 전반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인 실존주의에 대한 단편적인 고찰이 담긴 에세이 콘텐츠.


0. 영원한 것이 있을까. 우리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거나, 다음 생으로 혹은 사후 세계로 선형적으로 이어진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 우리 인생은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와 같다. 역사 속 많은 작가들이 인간의 유한함을 조명하기 위해 관습적으로 비교하는 대상인 대자연조차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만이 무한을 대변하는 상징물일 수 있는 것이다. 흐르는 물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먼 옛날 우리 이전에 우리의 땅을 활보했을 공룡들을 떠올려 보자. 혹은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로부터 129억 광년 떨어진 별 에렌델(Earendel)을 떠올려 보자.

ⓒ별을 쫓는 아이

1. 세상의 많은 것에는 끝이 있다. 만들어진 이야기들, 함께 보낸 시간이 가득한 관계들, 무엇인가로 대변되는 시간들과,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작되어 내가 가까스로 이어온 나의 세계 그 자체. 끝을 가진 그 수많은 것들 중, 단연코 우리를 가장 흔드는 것들은 우리가 감정적으로 몰입하기 쉬운 것들이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흐르는 물이 영원하다고 생각할 때 먼 옛날의 공룡들은 우리의 세계 밖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계 밖의 존재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그것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많은 것의 끝을 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끝은 충분히 가까워지기 전에는 스스로의 전조조차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별을 쫓는 아이> 신카이 마코토. 2011.

“잃은 것을 끌어안고 살아가라는 목소리가 들렸어. 그게 인간이 받은 저주야. 하지만 분명 그건 축복이기도 할 거야.”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라는 사실은 확신할 수 없지만, 이미 얻은 것의 상실은 필연이기 때문에 모든 삶은 잃어감의 연속이며, 그 잃어감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기에 상실은 저주이자 축복이다.



2. 우리는 그 무엇보다 끝과 가까이에 있는 존재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어가기 시작하고, 우리의 삶은 끝을 향해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연약함 속에 생을 이어가다 허무하게 죽을 뿐이며(장 폴 사르트르) 그렇기에 죽음을 이해해야 인간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마틴 하이데거). 아마 우리가 가진 유일한 필연은 우리가 유한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시작에서부터 죽음을 담지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끝은 그 무엇보다 가깝고 익숙한 개념임이 틀림없다.

ⓒ별을 쫓는 아이

3. 신기하게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필연임에도 그렇게 친숙한 끝의 개념을 자주 망각한다. 우리에게 끝이 친숙하다면 우리는 끝을 대함에 있어 아쉬움을 느끼되, 담담해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이야기의 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때 누구보다도 가까웠던 관계의 끝을 외면하며 그것을 터부시한다. 이별은 연인 관계에서 꺼내기 껄끄러운 주제가 되었고, 영원을 쉽게 약속할 수 없음을 이해하고 있더라도 이별에 대한 생각만큼은 유예하고자 한다. 그것이 관계에 독이라도 되는 양.

또한 우리는 죽음 역시 우리의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과거에는 집이 죽음을 맞는 공간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은 집으로 돌아와 생의 마지막을 준비했고,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자신의 유한함을 환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기능하는 세계와 기능하지 못하는 세계를 분리했다. 대부분의 죽음은 병원에서 이루어지며, 죽은 신체는 그것을 보이지 않게 가리는 상자에 담겨 병원에 딸린 장례식장으로 바로 옮겨진다. 기능하지 못하는 신체는 기능하는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을 우리의 세계로부터 추방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어느 매체에서도 죽은 신체를 직접 볼 수 없다.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운 사건일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게 죽음은 우리의 눈앞에서 멀어졌다.

이렇게 우리는 무수히 많은 끝을 눈앞에 두고, 심지어 우리가 그 끝으로 운명 지어져 있음에도 그것을 외면한다. 잊을 수 없는 것을 잊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망각한다.

ⓒ별을 쫓는 아이

4. 하지만 우리가 망각한 줄 알았던 끝은 불시에 우리를 찾아온다. 영원을 약속한 관계에는 이별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어느 순간 우리는 그것을 눈치챈다. 다시금 외면한다 해도 이별의 실체는 머지않아 우리에게 도둑처럼 온다. 대비하고 맞은 주먹보다 아픈 것은 갑작스러운 주먹이며, 대비한 하락보다 갑작스러운 하락장에 우리의 정신은 더 크게 무너진다. <초속 5cm> 1부의 어린 타카기는 아주 느린 속도로 상대에게 다가가도 될 정도로 가까이에 있던 아카리가 내년에도 함께 벚꽃을 보자는 약속을 뒤로하고 기차의 속도로 몇 시간을 가야만 서로를 만날 수 있는 거리로 떠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수화기 너머의 아카리에게, 서툴게도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이다. <별을 쫓는 아이>의 모리사키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아내 리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아카르타에 대한 연구에 쏟는다. 타카기가 조금 더 이별에 익숙했다면 더 성숙한 방법으로 불안해하는 아카리를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며, 모리사키가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웠다면 아내를 보내주고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커다란 감정적 동요를 동반한 환경의 변화를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미숙하면서 효과적인 대응은 이전의 환경을 모두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삶을 게임 캐릭터와 같이 보는 것과 같다. 게임 캐릭터는 조금 잘못 키우면 지우고 다시 키울 수 있지만, 우리 삶은 꼬여버린 실을 하나씩 다시 풀거나, 혹은 꼬인 채로 살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이별 이후, 이전의 관계를 실수나 미숙함, 나쁜 경험 정도로 싸잡아 나 스스로의 역사 속에서 은폐하려는 시도는 복잡한 심사를 안정하는데 너무도 효과적이어서 그것이 가능하지 않음에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망각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게 만든다.

우리가 모든 이별을 망각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듯 그것이 주는 거대한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것만이 우리가 끝을 의식해야 하는 이유는 아니다. 그것은 조금 더 실존적인 이유에서 의식되어야만 한다. 끝은 비통하며 동시에, 유한하기에 가능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동화적인 해피엔딩을 걷어내고 현실적으로 상상해 보았을 때, <초속 5센티미터> 3부의 성인이 된 타카기와 아카리의 재회의 가정은 우리에게 그저 씁쓸한 뒷맛만을 상상하게 한다. 미화된 과거의 기억이 현실과 만나 변색되는 경험을 우리는 모두 해 보았기 때문이다. 즉, 재회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렇게 이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끝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타카기는 어른이 되어 교차로에서 아카리와 스쳐 지나가기 전까지 이별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부재 상태를 경험하며 체득한 이별의 개념이 하나의 계기를 통해 온전히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별을 쫓는 아이>의 ‘아스나’가 진작 죽어버린 ‘슌’을 마지막 순간 보내고, 현실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신’에게 돌아오는 것도 이와 같은 이별의 자세이다. 끝내 아내를 잃은 ‘모리사키’에게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받은 저주라고 ‘신’은 말한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이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지향한다. 본질이라는 존재의 양식이 아닌 존재근거를 상실한 인간의 존재 상태를 설명하는 이 사르트르의 말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가진 상실감을 설명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두 영화 모두에서 신카이 마코토는 우리가 상실을 조금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를 괴롭히는 미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별을 쫓는 아이

5. 신카이 마코토의 이야기를 하는 김에 덧붙이자면 여러 다른 일본의 영화에서도 이렇게 상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태도가 보일 때가 많다. 가령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주인공인 ‘츠네오’가 부모님에게 조제를 소개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 장면의 연출이나, 영화의 마지막에 담담하게 이별한 조제를 보여주는 방식, 그리고 감정을 터트리는 츠네오를 원경으로 보여주는 방식 등에서 드러나는 감독의 시선이 그러하며,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지로’가 아내를 잃은 이후, 그녀가 꿈에 바람이 되어 나타나 ‘지로’에게 살아가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러하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가루칸 떡을 만드는 외할아버지가 전통문화의 퇴락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장면이 그러하다. 화(和)로 대표되는 일본의 정서가 개인의 행위에 대해 집단이 제재를 가하는 방식을 유도했고, 그것이 집단성이 강해진 국가체제 내에서 무력한 개인들을, 그들이 경험하는 부조리에 쉽게 순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다. 다만 이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전문적으로 내릴 수는 없겠으나, 이 상실에 대한 태도가 실존주의에서 지향하는 상실을 대하는 태도와 논리적 궤를 같이함은 자명하다.



6. 이별, 죽음과 같은 상실은 언제나 아쉽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것이 수많은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술이던 사랑이던 취할 수 없다면 찾아졌겠느냐는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상실 역시 고통스럽지 않다면 그것을 다룬 작품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받고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그 상실의 고통을 온전히 감내하고, 그 고통을 가능하게 했던 상실 이전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상실과 조금 더 가까워져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런던의 거리를 걷다 보면, 그곳이 전원적인 곳이던, 도회적인 곳이던, 교회의 안뜰 혹은 공원 한편에서 이미 삶을 뒤로한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을 쉽게 볼 수 있다. 도심 한복판에 덩그러니 위치한 안식의 공간에 붉은 노을이 흘러넘치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노인들은 그 앞 벤치에 앉아 함께 나이 든 반려동물을 쓰다듬고, 아이들은 비석 사이를 오가며 생기 넘치게 뛰어놀고 있다. 우리 삶이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로 결론지어질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죽음을 우리의 가까이에 두는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다.